사랑니 - 정지우 감독
왜 이 영화를 꺼내 들었는 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만약 내가 이 영화의 내용을 알았더라면 오늘쯤 이 영화를 봤을 거라는 걸. 하지만 난 이 영화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감독과 주연배우의 이름, 그리고 나이차이 많이 나는 사랑이야기라는 것 뿐이었다.
그러면 왜 내용을 알았으면 오늘쯤 이 영화를 보는 게 맞았을까... 추석이기 때문이다. 추석...
언제부턴가 추석이란 내게있어 그냥 명절만은 아니었다. 추석이면 유난히 꼬이곤 하던 문제들, 이맘때면 항상 전쟁을 치루던 사람들, 달이 차올때면 차오는 달만큼이나 내 주변을 속속 채워가는 추억들... 좋은 기억보다는 좋지 않은 기억이 많은 추석이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추석은 항상 특별했다.
첫사랑이란 것이 사람들의 기억속에 어떻게 추억되는 걸까에 대한 복잡한 듯, 단순한 이야기.라고 하면 딱 사랑니에 어울리는 한 줄 평이 될 듯하다. 어떤 인생을 살았는 가에 따라 복잡한 이야기이거나, 단순한 이야기일 것이다.
사실 첫사랑과 닮은 사람을 발견하고(보거나 만나는게 아니라 발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가슴이 콩당콩당 뛰어본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스타~~~일이야~~~'하고 빠져버렸다면 사랑니를 보면서 머리가 좀 아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순간, 첫사랑과 닮은 사람을 발견해내고 마는 나는 뭐지? 라는 생각을 한 사람이라면 단순한 이야기일듯하다. 두 무리를 구분하는 기준점을 영화속의 대사로 찾아보면, "너 어제 비온거 알아? 모르지.. 자는 사람은 밤새 비가 온걸 모르는 법이지." 각성을 촉구하는...ㅋㅋㅋ 농담!!
다시 말하자면, 내가 어렸을때 술 한잔하며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던 것의 정확한 영화버전이라는 것. 하지만 영화를 봐도, 직접 그런 일을 해봐도, 감정없이 쿨하게 생각해도 어떤 한 쪽만 사랑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 마찬가지다. 물론 어렸을 때는 이러이러해서 이건 사랑이 아니야라고 어줍지 않은 결론이 있었지만, 그것은 틀렸던 게 분명하고 지금은 답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보면 나는 예전보다 더 불분명하고 더 멍청해졌지만, 이젠 어떤 곤란한 일도 적당히 뭉게고 갈 수 있는 뻔뻔함을 터득한 셈이다.
마치, 첫사랑과 지금의 사랑과 지금의 동거인과 함께하는 저녁식사가 가능한 것처럼, 그 세 명의 남자가 나를 바라보는데(예전이었다면 세명 중, 단 한 사람의 눈길만으로도 숨쉬기 어려웠을텐데..) 이가 아프다며 장난을 칠 여유가 생긴 것처럼. - 그래그래, '뻔뻔함'보다 '여유'가 생겼다고 하는 편이 부드럽네.. 더 사람답고..
그래, 그렇게 여유로워졌다. 이건 이래야한다는 나름의 규칙도 필요없고, 이렇게 살아야한다는 예절도 무시할만큼 한결 여.유.로워졌다. 너무 대충 사는 건 아니냐고 묻지는 마라. 여유를 갖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대충'이라는 말을 어떻게 갖다붙여!
누구나 바라는 것처럼 쿨하게 사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아프더라도, 감정이 생기더라도 적당히 여유있게 살게 되는 것 아니겠나. 그게 나이먹는 즐거움이기도 하고... 예전처럼 파르르~ 떨 일이 없어 마음이 편하다는 것. 이것 역시 무뎌지는 것 아니냐고 묻지는 마라. 자꾸 내가 무슨 말만하면 토를 달던 녀석이 생각이 나서시리...
사랑니는 그렇다. 액센트는 없지만 몇몇 시퀀스는 대단히 훌륭하다. 대단히... 감독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는 지는 정확하게 알겠다. 그리고 왜 이 영화를 찍었는지도. 즉, 좋은 영화라는 말이다. 단지, 상업적으로 봤을때 관객과 소통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이 첫사랑이라는 소재를 좋아하긴 하지만,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너무 깨주는 것은 싫어하니까.. 첫사랑이라고 하면 모름지기 '그래, 그게 운명이었을지도 몰라~~' 뭐, 이런 설렘, 회한 같은 것을 느끼길 바라니까..
훌륭한 시퀀스들은 중반이후에 집중되어있는 관계로 혹시 보려는 사람은 버텨야한다. 중반이 넘어갈때까지.. 하지만 넘어가더라도 아주 흥분되거나 하진 않는다. 흠... 좋은 걸.. 하면서 바라볼 기회를 만들어준다는 것 뿐이다.
정지우 감독의 이전 영화는 최민식과 전도연이 나왔던 '해피엔드'였다. 그 영화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이번 영화도 때깔이 참 쨍하다. 조명감독이 잘 하는 건지, 촬영감독이 잘 하는 건지, 감독이 관리를 잘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쨍하다. 아마도 단순히 시각적인 것만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듯 싶다. 의도와 이미지가 맞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께다. 두편만을 놓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꽤나 이성적인 사람인 모양이다.
영화속에서는 저런 장면이 없었던 것 같은데, 있었나?, 느낌이 좋다.
진짜 좋은 사람하고 맛있는 식사는 것만큼 행복한 순간은 많지 않다.
추석은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것도 중요한 요소인데, 왜 추석이면 나누기는 커녕 다투기만 했는지 모르겠다. 그 놈의 달만 차오면 무슨 늑대인간처럼 미쳐날뛴다. 지금은 그때 왜 그랬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알겠는데... 그래서 달이 차도 정신 잃지 않을 수 있는데...
모든 게 영화를 읽을 때 말고는 쓸데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