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 산도르 마라이 作
작품에 대해 이것저것 쓰려고 했으나..
'열정'과 관련된 김형경님의 멋진 글이 있어서 이것으로 대신.. 역시, 작가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대단히 매혹적인 작품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매우 궁금해질정도로...
산도르 마라이 소설 '열정'의 콘라드에게
콘라드, 조국을 떠나 41년 동안이나 이국의 열대우림을 떠도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친구를 배신한 죄의식과, 사랑하는 사람을 외면한 비겁함과, 그럼에도 그들에 대한 그리움을 안은 채 유적의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합니다. 저는 당신이 41년 만에 귀향하는 시점, 즉 소설이 시작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당신의 41년을 생각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열대우림의 소나기처럼 수시로 당신을 적셨을 고독감이나 모멸감, 열대숲이 자라듯 당신 속에서 우거졌을 그리움이나 갈망들을 말입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조차 당신은 자신의 입장을 말하지 못합니다. 오직 당신의 친구인 ‘장군’만이 진술과 사면의 권리를 갖습니다. 친구와 아내로부터 동시에 배신당한 후 41년의 삶을 칩거 상태로 보낸 장군은 그 사실만으로도 도덕적, 감정적으로 온당한 자리를 확보합니다. 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기란 아주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입장에 서면 그 어느 것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소설의 액면 그대로 보면 당신은 친구의 아내와 통음을 하고, 그녀와 함께 도망칠 음모를 꾸미고, 친구의 등뒤에 사냥총을 겨누는 배덕자입니다. 그 계획조차 제대로 치러내지 못한 채 결국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버려두고 도망친 비겁자입니다.
그럼에도 왜 제게는 그 모든 이야기 뒷면에 있는 당신이 더 면밀히 느껴지는 걸까요? 하늘로부터 축복받는 듯한 귀족 청년인 친구 옆에서 성장기 내내 당신이 감내해야 했던 가난과 열등감과 시기심들. 그럼에도 그것에 대항하며 지켜냈던 우정과 사랑과 자존심과 관용…….
저는 당신의 그 얼룩덜룩하고 울퉁불퉁한 마음들을 손 내밀어 쓰다듬어 봅니다. 오락을 위해 외출하는 친구와는 달리 당신이 혼자 숙소에서 음악을 연주할 때, 당신이 먼저 사랑했던 여인을 부자인 친구에게 떠나보낼 때, 밀회 장소를 만들어 놓고 화려한 소품들로 그곳을 꾸며 놓았을 때, 그런 때마다 저는 당신의 마음이 손바닥에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그렇게라도 유지되던 우정이, 두 힘의 대결을 버티지 못한 채 결국 파괴되던 순간조차 제게는 가슴에 꽂히는 표창처럼 선연했습니다. 이성으로는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휘몰아치는 갈망, 생을 쏟아붓고도 후회하지 않을 열정에 대한 느낌이 그랬을 겁니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을 뚫고 들어와 꺼질 줄 모르고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 산 것이 아니겠지?”
콘라드, 당신과 장군은 41년 만에 만나 그렇게 지난 삶과 지난 감정들을 정리하지요. 그 긴 시간 동안 이국의 열대우림을 떠돈 당신이나, 자신의 성 안에 유폐되어 있던 장군은 실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신들이 서로의 그림자였다는 사실을 바로 그 지점에서 깨닫게 되지요.
당신, 이제는 편안하신지요? 그 모든 열정과 방랑을 지나온 삶의 마지막에서 무엇을 만나고 있는지요? 당신과 함께 당신의 조국 오스트리아나 당신이 떠돌았던 동남아시아의 열대우림을 여행하고 싶습니다. 그 햇살과 바람 속에서 당신이 들려주는 생의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은가 봅니다.
김형경 소설가
2005.04.15 (금) 20:03